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 불가침조약 (문단 편집) == 독일-소련 관계의 파국 == [[바이마르 공화국]] 시절 [[독일]]과 소련은 매우 사이 좋은 [[우방국]]이었다. 독일은 [[제1차 세계 대전]]의 패전국으로서 [[베르사유 조약]]으로 인해 항공 전력, 전차 등의 보유가 금지되었고, 또한 [[국제 연맹]] 가입을 거부당하고 있었다. 소련 역시 [[사회주의]] 국가였기에 국제 사회에서 왕따당하는 처지였다. 비록 양국이 1차 대전 때 피 터지도록 싸웠다고는 하나, 소련에 있어 그것은 [[러시아 제국]]의 일이었고, 독일 역시 [[독일 제국]]의 문제였으며, 두 제국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. 또한 [[카를 마르크스]]가 독일 출신인만큼 독일 내 공산주의자도 꽤 많았기 때문에 멸시받는 둘은 사이가 좋을 수 밖에 없었다. 이러한 상황의 타결책을 모색하던 독일과 소련의 이해 관계가 접점을 이루면서 독소 양국은 1922년 [[라팔로 조약]]이라는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.[* 라팔로 조약 이후, 25년에 [[게오르기 주코프]]와 [[에리히 폰 만슈타인|에리히 폰 만슈타인]] 등, 미래의 원수들이 양국을 방문했다.] 독일은 소련에 여러 선진 군사 기술을 제공하고, 소련은 항공 전력과 탱크 등의 보유 및 개발이 금지된 독일에 비밀리에 신기술 연구 및 군사 훈련을 할 수 있는 시설을 자국 영토 내에 제공하는 등 서로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. 아울러 양국 모두 [[폴란드 제2공화국|폴란드]]라는 가상 적국[* 특히 [[유제프 피우수트스키]] 치하 폴란드는 주변국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.]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다. 독일은 국경 인정 문제로, 소련은 1920년 [[소비에트-폴란드 전쟁]] 이후로 폴란드와 사이가 안 좋았다. 그러나 이런 양국 관계는 1933년, [[아돌프 히틀러]]가 독일 수상에 취임하면서 깨져 버렸다. 동유럽과 러시아를 정복해서 게르만 민족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[[레벤스라움]]이 나치즘의 핵심사상이었는데다가 "[[반공]]"을 외치면서 세력을 키워서 정권을 장악한 게 히틀러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소련과의 관계는 나쁠 수밖에 없었다. 그리고 히틀러는 [[전체주의]]를 통해 [[민주주의]]도 부정했기 때문에, [[나치즘|자신의 체제]]가 우월하다고 전세계적으로 선전을 하고 있었다. 문제는 스탈린도 마찬가지로 [[공산주의]]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체제 경쟁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. 이 때문에 독일-소련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. [[파일:1937 파리 엑스포 독일-소련.jpg]] 독일-소련 관계를 나타내는 [[1937 파리 엑스포]] 때의 사진. '''[[1941년]] [[독소전쟁]]의 [[리허설]]'''이라고 불리는 사진이다. 왼쪽이 [[나치 독일]]의 독일 국가관, 오른쪽이 [[소련]]의 소련 국가관이다. 소련은 [[낫과 망치]]를 들고 있는 [[노동자]]를, 독일은 세계를 내려다보는 [[독수리]]를 형상화했다. 이 당시 두 열강은 [[스페인 내전]]이란 전장에서 [[대리전쟁]]을 한창 치루는 중이었다. 중간에 위태로운 듯이 낀 [[에펠탑]]이 당시 전세계적으로 극우, 극좌 사이에서 위태롭던, 역사학자 마크 마조워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주는 듯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